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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팬시루나] Shall We Dance?

 

해리 포터 ; 4. 불의 잔 기반

 

사건이 일어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팬시는 막 4학년에 올라왔고, 별 관심 없는 척 속으로는 무도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드레이코 말포이가 곧 그녀를 파트너로 지목할 것이었고, 그러면 들뜬 마음을 꼭꼭 숨겨 가며 승낙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별로 대수롭지도 않아 보이는 전제 하나에 팬시가 상상한 것들은 수정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반짝반짝. 이변이 없다면. 물론 당연히 없어야 할 이변이었는데.

 

래번클로의 러브굿. 한 학년 아래의 그녀를 대부분은 루니라고 불렀고, 팬시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치하기로 따지자면 팬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성정이었지만, 별명을 붙여 놀리는 건 어쩐지 거슬렸다. 그 애를 놀리는 게 거슬리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 아니, 절대로 그런 게 아니다. 꿈꾸는 것 같은 목소리나 잠잠한 웃음이라거나 주의 깊게 들으면 딸랑 소리가 나는 멍청한 귀고리 따위에 결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절대로. 누차 말하지만 다만, 거슬렸다. 그래서 가끔씩 눈길을 줬을 뿐이었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때마다 적당한 때 거두지 못해 자주 눈을 마주치기도 했고, 그러면 예고 없이 번지는 미소에 어떤 태도도 취하지 못하고 바로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ㅡ물론 홍조는 가끔 있는 일이었다! 가끔!ㅡ거두절미하고, 팬시는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했으나 확신하지 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말도 한 번 안 나눠 본 발랄한 래번클로, 아직 한 학년이 모자라 무도회에 갈 나이도 안 되는 3학년짜리 여자애가, 심지어 저쪽에서 먼저 파트너 신청을 해 올 거라는 추측은 확실히 허상 쪽에 가깝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애는ㅡ 했다. 무슨 배짱인지 지하 기숙사 입구까지 찾아와서 팬시를 불러냈다. 그걸 본 다프네가 벌써부터 질린 표정으로 제 이름을 부를 때 알아챘어야 하는데, 무방비하게 그냥 달려나갔다. 달도 없는 여름밤이었는데, 은하를 흩뿌려 놓은 것 같은 목소리로 무도회에 같이 가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막막할 만큼 넓고 새까만 하늘을 멍청하게 눈만 깜박이며 바라보다가 생각해 볼게, 하고 답변하는 게 아니었는데. 허심이더라도 다신 못 할 저열한 말을 섞어서 단칼에 거절했어야 하는데. 돌아서는 그 애는 물론 팬시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또 다른 파트너 신청을 받았는지 되물었다. 아, 그때라도 거짓말일지언정 응, 하고 대답했어야 하는데. 제 상상만 믿는 게 아니라 모두 드레이코가 곧 제게 파트너 신청을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으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팬시는 벌써ㅡ 했다.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젓기만 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침실로 돌아오자 꼬치꼬치 아까 일을 물어보는 다프네 앞에 침대 커튼을 소리나게 드리우고 죽은 듯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말하느니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사실 그렇게 쪽팔리는 일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누구에게도 말하기가 싫었다. 루나에 대해서 함부로 떠드는 게 듣기 싫은지도 모른다. 성격하고는, 하고 뇌까리는 다프네를 무시하는 데 애써 온 신경을 쏟으면서 팬시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 없는 긴 잠 끝에 루나가 나와 살포시 웃어서 팬시는 소스라쳤다. 비명을 지르면서 잠을 깬 탓에 얼굴에 시선 몇이 곧장 꽂히는 걸 느끼면서 차라리 다시 눈을 감았다. 뭘 하는 건지 구석에서 수선을 떠는 다프네 대신 밀리센트 벌스트로드가 짧게 타박을 줬다. 아침 식사 굶고 싶지 않으면 서둘러야 할걸. 과장이 아니었다. 계속 이 속도로 꾸물거린다면 식사는 물론이고 1교시 수업에도 당연히 지각일 것이었다. 머리를 마저 빗으며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차분하게 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밀리센트를 뒤로하고 팬시는 침대를 정리했다. 곧바로 제 매무새 역시 정리해야 했으므로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바빴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다행도 연회장에 들어서서 숨을 돌리고서야 느끼기는 했지만.

 

다프네는 손에 힘이 풀렸는지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지는 숟가락으로 겨우 으깬 감자를 한 숟갈 뜨면서 귀고리 한 쪽을 잃어버렸었다고 뒤늦게 하소연했다. 원래는 제 언니 것이었는데, 그녀가 혹여나 도둑맞지 않도록 본인이 아니면 마법을 걸지 못하게 막아 놓았고, 문제는 동생에게 물려주면서 그걸 해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젯밤에 귀고리를 찼다가 바로 다시 빼서는 트렁크 앞가방에 넣으려고 했는데 그만 침대에 내려놓고 나서 깜박 잠들었고 뒤척이는 동안 올이 살짝 나간 담요 속자락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반쯤 포기하고 침대를 정리하다가 찾아냈다면서 한숨을 쉬는데 늘어지지도 않고 소리가 나지도 않는 다프네의 작은 보석 귀고리를 얼핏 보면서 팬시는 엉뚱하게도 루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더운데 아침부터 열 내느라 힘들었다면서 살풋 입술을 내미는ㅡ또래보다 키가 살짝 작은 편이지만 여전히 팬시보다 큰ㅡ다프네를 건성으로 토닥거리며 무인지 도토리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난해한 모양의 귀고리를 딸랑거리면서 뒤돌아 걸어가던 루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이상했다. 이렇게 누굴 자주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불쑥 솟는 예감을 찍어누르면서도 팬시는 고개를 돌려 눈으로 래번클로 테이블을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늘 있던 자리에 루나가 없었다.

 

루나가 없었다.

 

팬시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고 애썼다. 다프네가 왜 안 먹느냐고 걱정하며 제 접시로 넘겨준 올리브 샐러드나 베이컨 따위를 여전히 건성으로 집어먹으면서 먼젓번보다 훨씬 더 애를 써서 루나를 찾았다. 그렇지만 없었다. 잘못 삼킨 숨 때문에 사레가 들려 꼴사납게 켁켁거렸다. 물을 넘겨주는 다프네의 표정을 볼 여유도 없었다. 물음표로 꽉 찬 속을 헤집다가 문득 과민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생각을 내던져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연회장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 없었으므로, 파도치는 마음을 붙잡고 오전 수업을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팬시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엊저녁에 공들여 손질한 입술을 무의식적으로 질근질근 눌러 씹으며 진즉에 고운 가루가 된 재료를 한창 성의 없이 빻는 중이었다. 짝인 다프네가 질린 얼굴로 팬시를 툭툭 쳤다. 제정신이야? 소리 없이 입술만 뻐끔거리면서 뱉는 말에도 물론 제정신을 찾지 못했다. 점심 식사를 하러 올라가는 중에야 제풀에 번뜩 놀랐는지 눈을 깜박거리다가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대차게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복도를 데굴데굴 구르지 않는 대신 희생해야 했던 어깨를 문지르면서 팬시는 다프네라면 입에도 못 담을 만큼 저열한 수준의 욕설을 식사가 나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퍽 다양하게 쏟아냈다.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드는 다프네가 오늘 종일 보인 제 태도에 대해 뭐라고 쏘아붙이기 전에 팬시는 곧바로 다프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설치류들이 으레 그렇듯 볼이 한 줌은 부풀 때까지 전채로 나온 파이를 함부로 입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들을 의사가 없음을 분명하게 표시했다. 다프네가 길지 않은 한숨을 쉬자 팬시는 습관처럼 웃었다. 그리고 막 입안에 든 파이를 넘겼을 때 팬시는 착각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맑은 눈이 마주 웃는 것을 보았다. 함께 삼킨 숨이 밭은기침으로 쏟아져나왔다. 아침에도 그렇게 사레 들려 놓고서 느낀 게 없니? 놀란 다프네가 건네주는 찬물을 잔소리와 함께 넘겼다. 잔생각을 꼭꼭 접고 나서 조심스럽게 다시 뜬 눈에는 같은 웃음이 맺히지 않았다. 테이블을 암만 눈으로 들춰 봐도 지금 팬시를 바라보는 건 바로 옆에 앉은 다프네뿐이었다. 루나는 여전히ㅡ없었다. 팬시는 입맛이 똑 떨어지는 걸 느꼈다. 세상으로부터 뚝 떨어져나온 기분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어지러웠다. 제가 뭐 계절이라도 되는지. 속으로 짓씹었다. 글쎄 자꾸만 절 뒤흔드는 것 같고 사라졌다가 드러났다가 영 제정신이도록 놔두질 않는다는 점에선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창밖은 여름이었다.

 

밤, 공교롭게 루나가 저를 불러냈던 어제 그때와 같은 시각이었고, 팬시는 달리고 있었다. 오후 수업에 대한 기억이 흐릿했다. 저녁은 먹지도 않았다. 먼저 올라가서 먹고 있어, 하고 말했던 기억은 있지만 이제 그게 누굴 향한 말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까스로 뜰 안에 들어섰을 때 팬시는 무릎을 잡고서 허리를 숙였다. 숨이 턱끝까지 찼다. 도대체 어떤 멍청한 인간이 호그와트 안에서의 순간이동을 막아 놨는지 원망하며 팬시는 고개를 들었다. 한여름을 가로질러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팬시의 시야를 뒤흔들어놨는지 거짓말처럼 눈앞에 루나가 나타났다. 깜찍하게도 종일 모습을 비추질 않아서 종일 그녀의 애를 태우던. 점심때처럼 환상이라고 하기엔 지금의 루나는 너무 루나다워서, 바로 전에 팬시와 눈을 맞추고서도 손을 흔든다거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생긋 웃었다. 감정에 솔직해 본 적이 없던 팬시는 속으로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는 이 안도감을 나타낼 수 없었다.

 

종일 어디 있었기에 코빼기도 안 보여?

 

루나는 또 웃었고 팬시는 문득 루나가 토끼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했어요?

뭐?

내 걱정.

...

하셨어요?

 

채 답을 듣기도 전에 루나는 뜰 안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팬시는 잰걸음으로 루나를 좇았다. 부아가 나는 듯도 했다. 평생이라는 단서까지 붙이기엔 그리 오래 살아 보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쨌거나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애를 써 가며 누군가를 쫓아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하루 동안 거의 사라져 놓고 미안하지도 않아?

사과해야 하는 거예요?

그럼 아니겠니?

왜요?

 

그야 네가 내 파트너니까!

 

말이 생각을 앞질러 튀어나왔다. 팬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윽박지르건 말건 한결같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반문하는 루나가 바로 앞에 있었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순간 그 기류가 살짝 흔들렸다는 것뿐이었다. 네가 내 파트너니까, 하고 외친 이 순간. 벌써 엎지른 물이었다. 스스로의 태도가 황당해 견딜 수가 없던 팬시를 더 황망하게 한 건 제가 선배 파트너예요? 하고 묻는 루나에게 당연한 거 아냐, 하고 까칠하게 긍정하고 난 제 자신이었다. 자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것들이 전부 무너지고 부서지고 죽은 때문에 전부 새로 세워야 했고, 결정타는 바로 전에 스스로가 날렸기 때문에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루나가 또 토끼처럼 웃었다. 배실배실. 아주 잠깐 낚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가 바로 거뒀다. 늘 제정신이 별나라에 가 있는 저런 애가 누굴 낚을 수도 없어 보이거니와, 팬시의 자존심이 그럴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다.

 

미안해요, 잘 부탁해요.

 

내민 손을 살짝 잡았다 놓고서 눈을 내리깐 다음에야 팬시는 루나가 맨발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곧 루나도 제 발등에 꽂히는 팬시의 시선을 자각했다.

 

신발이 없어졌어요.

잃어버렸니?

아니•••, 제자리에 뒀는데, 애들이 종종 훔쳐가거든요. 또 어디 몰래 숨겨놨을 거예요.

...누가 널?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한두 번도 아닌데.

이름 말해.

어차피 늘 얼마 안 가서 다시 찾,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통금시간을 어기고 나와 있는 걸 들켰다간 사이좋게 감점 신세가 될 게 뻔했으므로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가며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팬시는 의문을 표시했다.

 

아씨오를 걸지 그랬니.

아빠가 웬만한 소지품에는 마법 못 걸게 막아놨어요.

너도? 왜?

엄마가 어둠의 마법 걸린 도구로 실험하다가 돌아가신 거라서.

실언했어.

아녜요.

 

루나는 울지 않았다.

 

...식사도 안 하고 종일 뭘 했어, 그럼?

수업은 들었는데, 연회장엘 못 들어가서.

왜?

다들 옆에 앉으면 불편해하기에.

 

내일 안에 다 죽여 버리지 뭐. 팬시는 생각을 표정으로 다 드러내는 편이었고 루나는 이번에도 울음 대신 토끼 같은 웃음을 세 번째로 보여줬다. 그 때문에 달이 없는데도 빛에 흠씬 젖은 것 같은 루나의 얼굴을 본 팬시는 내려앉는 것 같았던 심장을 추스르면서 새삼 제 파트너의 이름이 달님이라는 걸 되새길 수 있었다. 각자의 기숙사로 들어가는 갈림길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팬시는 입 모양으로 짧은 말을 건네다가 루나 역시 다프네와 키가 엇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기분이 나빠져서 하던 말을 툭 끊고 들어가 버렸지만 루나는 혼자서도 덜 끝난 말을 이어붙일 줄 알았다.

 

그리고 팬시는 말뿐 아니라 사진도 오리고 붙일 줄 알았다. 밤을 새워 가며 만든 사진은 머글 퍼즐처럼 쨍그랑 깨지면서 조각이 났고, 교정을 꽃잎처럼 흩날리는 종이들 중 하나를 주우면 조각조각 모여 맞춰지면서 멍청이들 몇이 루나의 신발을 훔치는 사진이 됐다. 잠깐 기다리면 그 멍청이들이 루나의 교과서며 가방에 낙서를 하는 사진으로 바뀌기도 했다. 무료한 아침,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그 사진이 사감실까지 흘러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플리트윅의 화난 목소리를 훔쳐듣고 지나가며 혹시나 하고 스쳐본 루나는 다행히 또 웃고 있었고 물론 신발도 신고 있었다. 루나를 멀쩡한 친구로 보는 아이들이 여전히 얼마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파급은 컸다. 오히려 그 때문에 일종의 경고처럼 보였는지도. 팬시는 다프네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입술 사이에서 바스라져 모양을 확신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 이상해지고 있는 것 같아.

 

...알고 있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다프네는 차마 건네지 못한 말을 삼키며 토닥거렸다. 엊저녁에 뭘 했는지 물어도 소용이 없을 걸 이제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은 제 손으로 음식을 담는 팬시를 아닌 중에 기특해했다.

 

무도회까지 나름 넉넉하게 남아 있던 시간은 아닌 척 순식간에 지나갔다. 드레이코가 예상대로 파트너 신청을 해 왔지만 팬시는 거절해야 했고 거절했다. 당사자보다 더 기겁해서 이유를 묻는 다프네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팬시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어쩜 그 딸랑이 귀고리보다 더 심오하거나 이상한 옷을 걸치고 올지도 모를 그 애와 함께 입장하게 될 텐데도 한결같이 기대에 차 있었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정말 조금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보다 더 오리무중인데도 좋았다. ...물론 무도회가!

 

적막 속의 소란이라던가, 연회를 딱 하루 앞둔 밤이 깊어갈수록 고학년 기숙사는 그 말에 꼭 맞는 형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프네는 보바통의 남학생이 건넨 신청을 막 수락한 참이었고,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속을 감추기 위해 애를 쓰던 드레이코에게 제 여동생을 파트너로 제안하기도 했다. 겁이 좀 많은 아이지만 무도회를 누구보다 궁금해하고 있을 걸 훤히 아는 그녀의 생각이 옳았을지는 내일이 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틀어올렸다가, 비녀를 꽂았다가, 귀 뒤로 한쪽만 넘겼다가, 다시 땋아내리면서 도무지 정답을 찾지 못했다. 다프네는 아직까지도 베일에 싸인 팬시의 파트너를 넌지시 물으려다가 관두었다. 혼자 가진 않을 거야. 마치 하지도 않은 말을 읽은 것처럼 답변하고 난 팬시는 눈앞을 가린 머리칼을 훅 불어 넘기면서 이어 말했다. 땋아서 앞으로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아. 다프네는 방금 전에 풀어내렸던 머리카락을 다시 땋기 위해 빗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더 이상 상념에 잠기기엔 너무 정신이 없었다. 도처가 무질서였다. 머리를 틀어올릴까 내릴까, 드레스 밑단을 줄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발목을 희생하고 굽이 있는 신을 신을 것인가 아니면 플랫을 택할 것인가, 혼잣말인지 대답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는 속삭임들로 학교가 뒤흔들릴 지경이었다.

 

다프네가 걱정하고 있는 건 좀 다른 문제였다. 스스로가 수수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린그래스는 유서 깊은 순수혈통 가문이었지만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산이 딸들의 학비를 감당하기에도 아슬아슬한 수준이라는 뒷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따로 드레스를 사 입을 수 없었다. 물론 동생도 다르지 않았지만 그 애는 벌써 말포이 가로부터 호의인지 동정인지 모를 상자를 받았다. 제 집안사정에 대한 짐작들이 무언의 정론처럼 여겨지는 게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동생의 의사가ㅡ그 애는 눈부신 군청색 드레스와 함께 담겨 온 티아라를 보고 거의 졸도할 것처럼 놀랐다ㅡ긍정이었으므로 가타부타 참견하지 않았다. 다프네는 물론 그런 상자를 받지 못했다. 다만 물려받았을 뿐이다. 큰언니가 입고 두 번에 걸쳐 아래로 물려준 검정이 섞인 짙은 녹색 드레스는 아름다웠지만 남들만큼 값비싸거나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가진 액세서리는 오직 언니로부터 물려받은 귀고리뿐이었다. 망사 장갑이며, 조그만 진주 펜던트를 엮어 가늘게 세공한 금팔찌, 에메랄드 목걸이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기도는 했을지도 모르지만. 다프네는 요란한 것들은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고상하며 정적인 것이 아름답다고. 오, 살라자르여. 다프네가 정말 씁쓸해하는 건 남들만큼 제 자신을 예쁘게 꾸미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남들 앞에 동정의 대상이 되는 거였지만 누가 이해할 수 있으리. 걸쳐놓고 보니 확실히 우아하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모양이었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녀는 팬시를 돌아보았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팬시도 드레스를 새로 샀다. 은회색. 빛을 받으면 얼마나 반짝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찼다. 정신없이 법석 떠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장식을 최소화했을 뿐 아니라 몇 주 전까지 종알거렸던 분홍색은 고이 접어 버렸다. 별을 뿌린 것처럼 다만 은색으로 해사한 드레스 밑단은 부드러웠다. 여름밤, 까무룩 잠드는지 점점 잦아드는 수다 떠는 소리를 뒤로하고 다프네는 마주 웃어 주었다.

 

그날 분위기는 내내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나서 안절부절못하던 몇 명의 학생들이 바로 휴게실로 달려들어갔다. 다프네도 그 무리에 끼어서 팬시를 달달 볶았다.

 

팬시, 빨리빨리! 미엘이 데리러 오기까지 이제 정말 손톱만큼밖에 안 남았어!

대관절 미엘이 누군데?

지금껏 내 파트너 이름도 모르고 있었니? 파트리크 미엘 말이야!

 

염병 그러니까 미엘이 뭐 하는 애인지를 소개해 달란 말이야, 하는 불퉁거림은 다프네의 절망적인 비명에 묻히고 말았다. 피피ㅡ다프네는 종종 팬시를 이렇게 불렀지만 애칭은 아니라고 우겼다, 넨장맞을 애정만 있으면 그게 애칭이지 별 거야? 다프네는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곤 했다ㅡ, 나 양말이 찢어진 것 같아!

 

아비규환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점점 고아하게 빛이 나는 다프네가 문득 팬시를 돌아보았을 때 그 얼굴에는 전혀 화장기가 없었다. 늘 그렇듯이 윤이 나는 단발머리를 빗고 있을 따름인 팬시의 투명한 표정에 결국 폭발하지 않은 것은 다프네로서는 거의 초인적인 인내였다.

 

팬시, 정말 서두르지 않아도 돼?

다 끝냈는데 뭘 서둘러?

 

언뜻 티아라 같은 머리핀을 얹은 팬시는 무료하다는 듯이 침대 아래로 발을 드리워 앞뒤로 까딱거렸다.

 

조금 있음 네 파트너도 데리러 올 텐데.

글쎄 다 끝났다니까.

 

다프네는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미간을 좁혔다.

 

혹시 그가 넌 아무것도 안 한 게 제일 자연스럽게 예쁘다고 하기라도 했어? 오, 그건 그냥 사탕발림•••

다프네, 제발 네 상상력을 스스로 자극하지 마.

 

팬시는 한숨을 쉬었다.

 

혹시 무도회가 시작하기 직전까지 네 파트너에 대해 알려주지 않을 건 아니지?

비밀은 원래 마지막 장에 적혀 있어야 해.

그것참 놀랍기도 해라.

난 네가 아직도 추리해내지 못했다는 게 더 놀라워, 에스코트까지 해 줘 놓고.

뭐?

 

옷자락을 매만지다 고개를 번쩍 든 다프네와 눈이 마주치자 팬시는 허리가 으스러져라 웃은 다음 손을 잡고 기숙사를 나섰다. 그리고 다프네를 데리러 나온 보바통 파트너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진 다음 제 길로 향했다. 그리고 모두가 댄스플로어 위로 미끄러질 때.

 

경악.

적막.

조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루나의 드레스는 꼭 소시지 목걸이 같은 형국이었고 여자 파트너를 데려온 것도 모자라서 무려 저런 애라니 알만하다는 말로 팬시는 코앞에서 수군거려지고 있었다. 끝까지 숨긴 이유가 있었더라며 되도 않는 연민을 보내는 쪽도 있었다. 다프네는 멍한 얼굴로 연신 팬시를 힐끔거리느라 춤이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 반면에 아스테리아는 드물게 웃었다. 팬시가 꽃망울처럼 웃음을 터뜨리면 루나는 수천의 잎사귀가 눈뜨듯이 미소지었다. 머글 자전거의 종소리 같은 영롱함으로 소리내어.

 

하나, 둘, 자세를 바꾸고.

 

대체 누가 이 순간 너를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니? 팬시는 근본 없는 애련이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챔피언이고 무엇이고 상관없었다. 루나가 신경 쓰지 않고 웃고 있었으므로. 서툰 몸놀림 따위를 누가 비웃을 수 있겠어? 그보다 도대체 누가 그걸 신경 쓰겠어? 누가?

 

다시 한 번, 돌아서 마무리.

 

팬시는 두 곡을 연달아 소화하고 쓰러지듯이 기대 앉아 여명 같은 홍조가 오른ㅡ보통은 더없이 창백했다ㅡ뺨을 문지르며 얼음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쉴새없이 온갖 질문 세례를 피해 루나를 데리고 한적한 테라스로 도망쳤다. 저는 댄스파티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상상도 못 했어요. 루나의 볼도 달아올라 있었다. 프릴이 대중없이 매달린 복사꽃 빛깔의 치맛단이 흔들렸다. 키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한여름의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이고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팬시 파킨슨의 파트너는 루나 러브굿이었고 춤에는 염병 정말로 소질이 없는 둘이서 한참 춤을 췄다. 그다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루나는 웃음이 예쁘다. 연지 따위로는 흉내낼 수도 없이.

 

한 줌의 음악도 없이 느린 속도로 다시 한 번 춤을 추면서 팬시는 달빛에 잠겨 가고 있었다. 파란 눈을 가진 달빛.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달에. 무도회의 열기는 갈수록 푸르러졌고바야흐로 새파란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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