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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루나] The end of the world.

 

If this was meant for me, why does it hurt so much?

And if you're not made for me, why did we fall in love?

You're dislocated, don't be like that.

And you smile when you dive in, like you're never coming back

So hold my body, yeah, hold my breath.

See your face when I blackout, I'm never coming back.

/SYML. fear ot water.

 

그녀는 알코올 중독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보고서를 작성할 때보다 바에서 산 술의 알코올 도수를 확인할 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형사였다. 하지만 몸놀림은 술을 평생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사람만큼이나 날렵했다. 싸구려 술집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술이 깬 뒤에는 불경기를 원망하는 사람들처럼 두 눈이 붉었지만 그녀의  동공이 스카치 워터, 또는 진토닉을 밤새 마셨을 때처럼 확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지는 않았다. 연쇄 살인범으로 추정되는 검은 형체는 그녀의 손에 권총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몸을 뒤로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퇴로를 차단당한 뒤였다. 붉은 머리의 여자 형사는 연쇄 살인범으로 확정된 다섯 번째 용의자에게서 총구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빗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섞여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살짝 벌린 입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다섯 번째 용의자, 연쇄 살인범은 릴리의 말에 따라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서, 코브라를 연상시키는 날렵한 디자인의 권총으로 옮겼다. "내 몫이야." 릴리는 그녀가 연쇄 살인범 앞에서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완벽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마리안느는 시멘트로 급하게 마감을 한 지하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방울은 차례대로 마리안느의 이마와 뺨, 입술 위에 떨어졌다. 마리안느는 현명하게도 밧줄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섣불리 몸을 움직이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물방울이 하니씩 떨어지는 지하실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습기로 인해 지하실 천장에 물방울이 맺힌 것인지, 천장에 뚫려 있을지도 모르는 구멍을 통해서 물방울이 지하실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마리안느는 몸이 묶여 있었던 탓에,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뒤에도 이마 위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의 근원을 알아낼 수 없었지만 비릿한 피 냄새가 그녀의 콧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살인범은 피 냄새를 맡은 마리안느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확인했고, 마리안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기 직전인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두 번째 타깃을 처리하기에 적합한 떄라고 확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하실의 불을 켜야 했다. 그는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이야말로 타깃에게 공포심을 주입하기에 가장 적합한 순간이라고 확신했다. 살인범은 무표정한 얼굴로 스위치를 눌렀고, 마리안느는  자신의 몸에 묶여 있는 밧줄과 같은 종류의  밧줄로 손몪이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는 남자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 남자의 시신은 하루나 이틀 전에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마리안느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직전에, 또 어쩌면 마리안느가 심한 두통을 느끼고 지하실로 들어온 이래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시신의 손목에는 밧줄의 거친 표면에 긁혀 살 껍질이 벗겨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리안느가 물방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칼로 난도질을 한 듯한, 두서너 개의 커다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였다.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남자의 시신은 실제 사람과 최대한 비슷하게 제작한 할로윈 소품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천장에 매달려 모빌처럼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살인범의 손이 마리안느의 목을 조르기 전까지, 마리안느는 신음 소리 비슷한 것을 내려고 시도했다. 마리안느의 연푸른색 눈동자는 거울처럼, 살인범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와 밧줄에 두 손이 묶인 채로 천장에 매달린 남자의 시신을 비추고 있었다. 살인범, 마리안느의 목을 졸라 살해함으로서 '연쇄 살인범' 이라는 호칭을 갖게 된 그는 마리안느와 얼굴이 망가진 남자의 시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타깃을 선정하기 전에, 마리안느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살인범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마리안느의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눌렀고, 장의사를 연상시키는 섬세한 몸동작으로 그녀의 시신을 비닐 백에 담았다. 비닐 백의 지퍼를 닫기 직전, 살인자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시신은 모빌처럼, 시계 방향으로 반 바퀴씩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살인자가 남자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기 전까지, 그의 연한 푸른색 눈동자에는 실제보다 훨씬 더 섬뜩하고, 더 끔찍하게 보이는 날붙이의 왜곡된 형상이 담겨 있었다.

 

경찰서 본부는 한마디로 막장이었다. 주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꽤 괜찮았지만, 자기 타입은 아니라는 거짓말을 할 마음이 싹 사라지게 만드는 끔찍한 첫인상의 소개팅 상대처럼. 루나는 연쇄 살인 사건을 담당할 형사에 대해 물었고, 그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루나는 실망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수첩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기록하는 시늉을 하려 했지만, 펜을 가져오지 않았던 탓에 수첩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어야만 했고, 다양한 이유로 경찰서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경찰서에서 따로 마련한 듯한 의자에 무릎을 한쪽으로 모으고 앉아서 그녀가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처럼 보이는 서류에 형광펜으로 무언가를 연신 표시하던 경관이 자동차-타이어가 아스팔트 위에서 미끄러지는 소리로 보아 연식이 오래된 차량인 듯했다-를 주차 구역에 주차하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루나는 경관을 따라 경찰서 건물 밖으로 나갔고, 오래된 승용차(왼쪽 미등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루나는 술에 취한 십대들이 치킨 게임이라도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가 경찰서 주차 구역에 주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붉은 머리를 고무줄로 뒤통수에 고정시킨 여자 형사가 차에서 내렸을 때, 루나는 이 막장 경찰서 본부에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결심했다. 청바지와 스웨터 차림의 그녀는, 슈퍼마켓의 상품 진열대를 관리하는 직원만큼이나 서둘러서 사무실로 향했다. 루나는 구두 굽을 매끄러운 리놀륨 바닥에 부딪치며 그녀의 뒤를 쫒아 사무실로 들어갔다.  릴리의 사무실은 다른 강력계 형사들의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주로 보고서를 수정할 때 사용하는 수정테이프를 비롯해서 꼭 필요한 물건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릴리는 루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익숙한 듯이 스카치 워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릴리는 스카치 워터를 만들면서 자신은 오늘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므로,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한잔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루나는 경찰서 본부의 사무실에서, 범죄 전문 기자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로 스카치 워터를 만드는 릴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하마터면 알코올 도수가 몇 퍼센트냐고 물을 뻔 했다. 릴리는 루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스카치 워터는 경찰 업무에 지장을 주는 종류의 술이 아니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루나는 알코올 중독에다, 불친절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여형사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으므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범죄 전문 기자라고 했죠?" 스카치 워터를 한 모금 마신 뒤에, 릴리는 루나가 들고 있는 취재용 수첩을 바라보며 사무적인 태도로 물었다. "네,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 되지는 않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다른 일을 조금 하다가, 이 일에 뛰어들었거든요." 릴리는 루나의 얼굴에, 기자 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 특유의 기대감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복직한 지도 오래 되지 않았으니, 우리 둘은 공통점이  있는 셈이네요. 나에 대해서, 혹시 알고 있어요? 당신 상사, 지금은 전처럼 자주 현장에 나가지 않겠지만, 마이클이 날 잘 알 텐데. 나랑 같이 일했던 적이 있거든요. 내가 지금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술을 마셨을 때 말이에요." "음, 솔직히 말하자면, 알코올 중독자와 일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당신이 사건을 해결하는 솜씨는 무척 대단하다고 했어요." 릴리는 루나의 상사, 한때는 자신의 동료였던 그가 루나에게 자신과 일하는 것이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는 말밖에 안 하던가요? 할 말이 더 많을 텐데." "제가 경험을 통해서 터득하길 바라셨는지도 모르죠." 경험, 마이클은 릴리가 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에서 한 달간의 집중 치료를 마치고 공허한 기분과 더불어 치료가 종료되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던 날, '탈출'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예전처럼 전화로 수다를 떨자고 청했다. 알코올 중독 판정-형사에게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을 받기 전에도 마이클을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일종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릴리는 그저 마이클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마이클은 루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게 벌써 몇 주 전이니 루나가 마이클의 후배 직원으로 들어오기 이전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릴리는, 실종사건-살인사건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는-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기인한 부담감 때문인지 마이클이 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척 서운하게 느껴졌다.

 

연푸른색 눈동자, 바다를 닮은, 그리고 바다보다 더 푸른, 두 개의 안구가, 유리 덮개를 덮은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보관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안구를 적출한 이후에 시신경을 비롯해 눈구멍과 연결되는 부분을 모두 절단한. 안구는 푸른 빛깔의 홍채가 위를 향하는 모양으로 유리 덮개가 덮인 책상 위에 흔들림 없이 놓여 있었고, 죽음의 신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다시 말해서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감지하지 못할 속도로 먼지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안구의 푸른빛은 먼지로 인해 미세하게 흐려졌지만, 그 차이를 감지한 이는 없었다.

 

릴리는 범죄 전문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금발 여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여자는, 알코올에 중독되기 직전의 릴리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열정적이었고, 재치가 넘쳤고,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것에 너무 익숙한 사람은 무언가에 쉽게 중독된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에서 한 달간의 집중 치료를 받은 이상 형사로서의 직감이 발동했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를 유치장에 처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릴리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에 붙은 보푸라기를 떼어내며, 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는 경찰 업무에 복귀하지 못할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트레이닝복을 모두 내다 버린 것을 후회했다. 무릎 부분에 빨간 헝겊을 댄 청바지와, 무언가 다른 것을 뜨개질하다가 털실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어쩔 수 없이 스웨터를 짜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하얀 스웨터는 강력계 형사의 옷처럼 보이지 않았다. 경찰 제복은 며칠씩 잠복근무를 할 때 즐겨 입었던 후드 티셔츠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녀의 옷장에 걸려 있었지만, 경찰서 본부에서 갑자기 그녀를 호출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다림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구겨진 제복을 입고, 헝클어진 붉은 머리는 고무줄로 뒤통수에 고정시킨 채 알코올 중독 판정을 받고 휴직계를 제출한 지 몆 개월 만에 경찰서 본부로 출근할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녀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완전 알코올 중독자'와 '조금 알코올 중독자'의 경계에 서 있는, '반쯤은 알코올 중독자' 였으므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났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았다. 릴리가 술을 완전히 끊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술을 끊지는 않았지만 대신 알코올 중독과 타협했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중독과 타협한 중독자는 아마도 자신이 유일할 거라는 우스운 생각을 하며, 릴리는 스카치 워터를 홀짝거렸다. 릴리는 술잔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고, 반쯤 찬 술잔에 비쳐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록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틀어올린 붉은 머리카락과 완벽한 대비를 이루었다. 

 

서점을 운영하는 빌은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여름 휴가 게획을 세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이번 여름은 지난 여름처럼 고요하지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연출하는 여름처럼 추억을 만들기에 적합한, 맑은 날씨가 지속되지도 않을 것이었으므로. 작은 마을에서 연달아 일어난 실종 사건은, 그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여름을 공포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장치인 흐린 날씨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끔 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을 운영하는 빌은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가 생각하기에 일흔이라는 나이는 잃을 것은 물론 얻을 것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실종된 지 일주일이 갓 지난 여자의 시신을 도랑에서 발견했을 때,  그는 세상이 그녀의 연푸른색 눈동자 위에서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여자의 입 안에는 고딕 스릴러 소설에서 주로 사용하는 장치이기도 한,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납치범-이제는 살인범이라고 불러야 옳겠지만-은 필체를 숨기기 위해 타자기로 쪽지, 혹은 메모를 작성했다. 구식 타자기를 사용한 게 틀림없다고, 타자기를 수집하는 별난 취미가 있는 형사가 확신에 차서 말했지만 타자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상관하는 것은 누가, 어떤 이유로 마리안느를 살해했는지, 타자기를 수집하는 형사의 말을 빌자면 '살해 동기'가 유일했다.

 

마리안느의 부검 기록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부검 기록 없이 단독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뒤따랐기 때문에 릴리는 지역 신문에 짦게 실린, 음주 운전 사고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기로 결심했다. 식료품 따위를 판매하는 마트라기보다는 슈퍼에 가까울 뿐더러 그나마도 동네에 하나가 겨우 있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던 젊은 남자-소위 생활고라 불리는 것은 나이에 국한되지 않는 모양이었다-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트럭 운전수 일자리를 추가로 얻었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끔찍하다' 고 할 수도 있는, 하지만 참혹하다는 표현이 훨씬 적합할 듯한 교통사고를 불러왔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로 운전대를 잡았고, 그가 알코올 중독 증세를 떨쳐내지 못한 전적이 있다는 사실을 방패로 내세워 스스로 파렴치한임을 밝히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의 동정은 그에게 쏠리는 듯싶었다. 알코올 중독, 대부분의 사람들은 빌어먹을 알코올 성분이 함유된, 릴리의 혈관에 피 대신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액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릴리는 사고 당시 운전수가 도로 교통 표지판과 술집 간판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지만, 회의실에 모인 열 명의 사람들 중에서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알코올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언제나, 어느 시대에나 법망을 피해 가는 노련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알코올 중독 센터에서 한 달간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강력계 형사로 활동하고 있는 릴리 에반스 자신도 법망을 피해간 사람에 속했다. 게다가 릴리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았을 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알코올 중독 센터에 입원하기 전까지 음주 상태에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코올 중독자 판정을 받은 형사가, 음주운전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가 제기한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제만큼이나 소모적이었고 그녀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사건에 몰두할 이유를, 그녀가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를 찾고 싶을 뿐이었다.

 

릴리는 문을 연 지 두 주가 채 지나지 않은, 구멍가게 앞을 지나고 있었다. 술 없이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밤을 편하게 보내지 못할 것 같은, 밤새 뒤척이며 신음할 듯한. 릴리는 잠시 고민한 끝에 진토닉 캔을 사기로 결정했다. 화이트 와인이 한 병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의 자제력과 더불어 인내심을 시험할 목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문자 그대로 '시험용 도구' 였다. 알코올 중독자이면서 동시에 형사일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지만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볼에 여드름이 난 계산원에게 진토닉 캔의 값을 지불하면서, 그녀는 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에서 받았던 교육의 내용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최소한, 노력은 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종종 그녀가 알코올중독자이면서 동시에 형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곤 했다. 릴리는 그녀의 알코올 의존 증세가 수갑 채우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재치 있는 답변을 할 기회를 놓치곤 했다. 릴리가 과거를 추억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행동을 하는 사이, 계산원은 검은 비닐봉지에 진토닉 캔을 담아서 거스름돈과 함께 건네주었다. 릴리는 비닐봉지를 팔에 걸었고, 뚜껑이 열린 채 계산대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만 유리병에 거스름돈의 일부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 치료 프로그램에서 만난 의사는 그녀는 보통 사람들만큼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극단적이어서 자신의 문제를 과장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엿 먹으라지.'  가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로 만든 출입문을 어깨로 밀고 나오면서, 릴리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극단적이고, 치밀하고, 딱 보통 사람들만큼 우울한 여형사에게는 놀랍게도 알코올 중독 치료 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기록이 있다. 자, 이제 어쩌실 텐가? 릴리는 봉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진토닉 캔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의 형태가 느껴지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알코올, 빌어먹을 진토닉과 작별하는 것은 다음 날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알코올 중독과 타협하는 것 또한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자신의 중독 증세에게 선택권을 위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릴리는 진토닉 캔이 담겨 있는 비닐봉지를 다시 팔에 걸었다.

 

아침,  십대들을 겨냥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즐겨 사용하는 표현을 빌자면 빌어먹을 아침이 도래했다. 하이틴 드라마에서 앞뒤가 꽉 막힌 교장을 연기할 것처럼 생긴 걸로는 모자라는지, 융통성이라고는 정말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경장이 릴리를 비롯한 다른 형사들의 지각을 용납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다른 때처럼 릴리를 타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눈동자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외곬인 데가 있는 사람들이 가끔 그러하듯이, 그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일 수도 있지만. 릴리는 권총을 허리에 고정하는 용도의 벨트를 찾느라 15분을 허비했다는 말을 해도 좋을지 고민하느라, 수사팀 인원은 몇 명 정도가 적당하겠느냐는 경장의 말에 엉뚱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적어도 다섯 명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릴리의 말을 듣고 나서, 경장은 곤란한 듯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에반스, 자네도 알고 있잖아. 자네의 수사팀을 지원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경장은 그녀가 메리 포핀스처럼 옷을 입고 있기나 한 듯이 릴리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몇 명까지 지원해 줄 수 있으신데요? 상부에서는 연쇄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데, 알코올 중독인 형사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대요?" "거의 그런 셈이지." 릴리는 경장이 곧 수사팀을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고, 선수를 치기로 다짐했다. "알겠어요. 그런데 경장님, 정정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여건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가 복직했기 때문이겠죠. 릴리 에반스가." 경장은 릴리가 방금 오스카 와일드의 시를 읊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두 명, 자네를 포함해서 세 명이지. 두 명 정도는 지원해 줄 수 있다네." 경장이 릴리의 수사팀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보덴슈타인이나 해리 홀레(공교롭게도 해리 홀레 시리즈의 주인공, 해리 홀레는 그녀보다 더한 알코올 중독자였다.)처럼 뛰어난 형사가 아니었다. 전대미문의 괴도, 아르센 뤼팽이라면 모를까. 세 명의 인원으로, 알코올 중독자 한 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두 명이라고 봐도 무방한 세 명의 인원으로 연쇄살인범을 체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장은 릴리에게 희생자들의 얼굴 사진과, 마리안느의 시신을 부검한 기록이 들어 있는 파일을 넘겨 주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릴리는 연쇄살인범에게 희생된 사람들, 시신으로 발견된 마리안느를 포함한 다섯 명의 희생자들의 신체적 특징을 찾는 데 집중했다.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가 그들의 외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살인범은 푸른 눈동자에 일종의 콤플렉스를 지닌, 정신 질환자인 걸까? 릴리는 미간에 두어 개의 주름을 잡은 채로, 마리안느의 부검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살인범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리안느의 목을 졸라 살해했지만, 치밀하게도 시신에서 자신의 지문을 말끔히 제거했다. 지능이 뛰어난, 간혹 살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연쇄 살인범의 경우에는 추적하기가 무척 어려웠다는 사실을 복기하면서 릴리는 책상 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안느와, 그녀를 비롯한 다섯 명의 희생자들을 살해한 이는 천재적인 살인범에 속했다. 그(혹은 그녀)는 세기의 살인범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광적인 살인 행위와 재능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다섯 건의 납치 사건과 더불어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르고도 경찰에 덜미를 잡히지 않은 그를  살인의 천재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이치에 맞는 행동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천재, 빌어먹을 살인의 천재. 셜록 홈즈의 두뇌와 아르센 뤼팽의 지혜를 가진, 살인의 천재에 필적할 또 다른 천재만이 그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마이클은 루나에게 릴리가 속한 수사팀의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라고 지시했고, 루나로서는 마이클의 지시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붉은 머리의 여형사는 루나가 처음 만나는 유형의 사람이었고, 그녀를 다시 만날 유일한 방법은 마이클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었다. 루나는 자전거 페달을 밞기에 앞서, 휴대용 녹음기를 비롯해 취재 도구의 대부분이 들어 있는 가방을 바구니에 실었다. 루나는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이 자가용이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사람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함으로서 면허를 취득할 자격을 얻게 된 이후에도 모종의 이유로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었다. 루나는 머리카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여름 햇살의 뒤를 쫒으려는 것처럼 페달을 힘껏 밟았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로 구분되는 사계절 중에서도 여름이 유독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름에 사랑에 빠지기 때문일 터였다. 적어도 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사는 종료되었다. 그, 다섯 명의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희생자를 선정할 때 적용했던 기준은, 수사팀의 추측대로 푸른 눈동자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였다. 수사팀에 소속된 경찰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그는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짦게 웃음짓고는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루나가 기자 생활을 청산하기 직전에 쓴 기사는 이렇게 끝났다. 사건을 요약하는 루나의 솜씨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살인범, 수사팀의 막내 역할을 톡톡히 했던 콜을 비롯한 다섯 명의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그가 루나의 고등학교 친구였다는 것이다. 루나는 그와 친구 이상의, '친밀하다'고 뭉뚱그려서 표현할 수 있는 관계였다. 루나는 그가 푸른 눈동자-바다를 연상시키는, 가장자리마저도 선명한 푸른빛인 눈동자-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 계기를 몰랐음에도 내재된 공격성을 더 빨리 알아채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루나는 그가 마음 깊은 곳에서 괴물을 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그와의 관계가 잊혀지기 직전의,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다는 표현으로 대변될 수 없는 관계로 거듭나기 전까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릴리는 콜의 죽음 이후로 의기소침해진 듯한 레이첼과 함께, 사건의 진상을 요구하는 다소 자극적인 인터뷰를 제외한 나머지 인터뷰를 진행했다. 무릎까지 내려올 듯한 다크서클 때문에 레이첼은 블랙커피로 연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릴리는 그것이 콜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콜은 경찰대학을 갓 졸업한, 검은 곱슬머리와 대비되는 푸른 눈동자가 서퍼를 연상시키는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푸른 눈동자. 그가 콜을 마지막 희생자로 지목했을 때, 릴리는 희생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조금 더 빨리 알아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수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레이첼과 함께 희생자들의 신체적 특징을 기록하는 동안 살인범이 푸른 눈동자에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릴리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질 정도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마리안느와,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신원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치과 기록을 통해서 간신히 신원을 파악했던 가엾은 벤, 해리와 클레어, 그리고 언젠가, 릴리와 레이첼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다정하게 맞아줄지도 모르는, 콜.

 

"당분간은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요." 릴리는 루나가 기자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으며, 결국 수사가 종료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을 때 사표를 제출했다는 이야기를 며칠 전에 마이클에게서 들었지만, 자신이 경찰 일을 그만두지 않은 것처럼 그녀도 기자로서의 생활을 계속해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약간 당황스러웠다. 루나는 계속 말했다. "릴리, 당신은 여전히 절반쯤은 알코올 중독자이고, 어쩌면 남은 인생 내내 알코올 중독과 카페인 중독-당신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당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형사들은 카페인에 절여져 있거든요-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난 당신이 스스로의 불완전한 면을 세상에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라서 좋았어요. 당신은 일 년 중 360일을 불안해하고, 나머지 5일 동안 그 불안을 딛고 일어설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이에요."

 

일 년 중 360일을 불안해하는 사람, 릴리는 생각을 정리할 목적으로 스카치 워터를 만들면서, 루나를 처음 만났을 때 마셨던 것과 비슷한 맛이 나기를 바라는 스스로를 타박했다. 어쩌면 루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릴리는 불안증세와 타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 때문에 늘 어디론가 훌쩍 떠날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릴리는 루나를 찾아냄으로서, 중독 증세를 비롯해 그녀를 이루는 것들 중에서도 고장난 것,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불완전하고, 흔히 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들을 릴리는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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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John Williams - Hedwig's Theme.mp3Artist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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